“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려면” (요한복음 14:26-27) 7/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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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6-27)
어제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섬기시는 교회 권사님이 돌보던 9살짜리 아기가 음식이 목에 걸려 뇌에 산소 공급이 안되어 응급실에 갔는데 72시간을 지켜봐야 살아날지 살아나더라도 뇌에 손상이 없을지 알게된다고 기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도할 뿐이지만, 만약 이 어린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부모님은 물론이겠지만, 돌보시던 권사님도 그리고 이 기도 요청을 하신 분도 전재산과 모든 명예 학벌 그외 모든 인간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남김 없이 바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사실이 좀 더 실감나게 생각되었습니다.
저도 설교 준비를 하던 중 그 소식을 듣고, 지금 애기가 죽어 가고 있는데 너무 이 급박한 상황에 화평하고 아니고가 무슨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화평한 관계 화평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단지 우리끼리 잘 지내고 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교클럽과 무슨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 있는 천국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할 사명과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리느냐는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영혼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때문에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실지로 초대교회때 (1-4세기까지)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2세기와 3세기를 살았던 교부 터툴리안은 당시 로마사람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같이 인용합니다: (자기들은 서로를 미워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보라’고. (우리들은 서로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라’
예수님도 우리가 서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시고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은 결국 세상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고 화평된 관계를 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화평된 관계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Peace-maker 즉 평화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평화를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행해야할 일을 여러가지로 명령을 합니다.
•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
•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라
•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말라
•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다른 지체를 먼저 존경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려는마음이 없다면,
악을 선으로 갚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원수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마태복음 5)
사실 어떻게 미운 사람을,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선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케 하는 자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치 못하면 자기 마음도 복잡하고 바쁜데 어떻게 원수같은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여유를 갖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다면 원수같은 자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평한 관계를 가질 의욕도 못느끼고 가져야할 필요조차 못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쉽게 멀리하거나 포기하게됩니다. 그뿐 아니라, 특별히 문제를 못느끼는 성도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신경쓸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평강)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과 저를 교회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시시 때때로 그리고 모든 일에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이 것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의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고 누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바울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 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엡 1:1-2 베드로도 역시 그가 쓴 베드로전서 와 후서에 각각 은혜와 평강을 빌고 있습니다.
먼저 은혜를 받아야만 평강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은혜를 통해서만 인간은 죄의 용서함을 받고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왕입니다. 그가 정치적인 갈등으로 아들 크리스파스를 죽인 후 죄책감으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로마 신전에 사죄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로마 신전에서 섬기는 사제는 사죄의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죄의 길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골도바의 감독 호레야스란 분을 통해 십자가의 무한의 은혜를 듣고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
일제 치하인 1923년 이찬형이란 젊은 서른여섯 살 판사가 있었습니다. 이찬형씨가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음이 괴로워 사나흘 밤잠을 설쳤습니다. '내가 무슨 권리로 사형 판결을 할 수 있는가?' 그는 번민 끝에 출가(出家)해 스님이 됐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스승 효봉 선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런 특별한 case가 아니더라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안 하려면 죄사함의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안도 있고 환경적인 평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안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용서받는 진정한 평안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할 때 경험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롬 15:13)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가지려면 “믿음 안”에서란 조건이 붙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자기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나의 느낌이나 나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하시기 위해 외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평안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이 구원의 감격을 잃게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잃게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3:16) 예수 처음 믿을 떄뿐 아니라 우리 일생 끝나도록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항상) 일마다 (모든 일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체험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매일의 삶에서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체험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이제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 2:20) 어제만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매일 매일의 삶에 있어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현재적 믿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이 오늘 그 똑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느끼는 평안은 이런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21)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여러분 속에 심어 주신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여라” 구원의 말씀을 이미 우리 마음 속에 받아들였지만 계속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구원의 말씀이지만, 이미 우리 마음에 심겨진 그 구원의 말씀을 매일 매일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묵상하기 보다는 다른 것에 한눈을 잘 팔고 내버려야할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가 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이 일주일 동안 신문을 안보니까 마음이 평안해 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문기사를 보면 정치기사는 물론이고 일반 기사들도 마음을 들끓게하는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견해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상반되는 의견을 주장하는 정치가나 평론가나 전문가들에 대해서 못된놈 죽일놈들이란 원망과 비난과 함께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다 보니까 마음의 평안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15절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라고 말씀한 바로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 (은혜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거하여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나 순간마다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죄를 멀리하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죄를 씻겨주시며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또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한가지만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읽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6-27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막 바로 평안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참된 평안을 경험한 것은 오순절날 성령님이 오신 이 후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말씀하시기 전에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가 평안을 갖는 것은 성령님께서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므로 평안을 갖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성령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을 주시거나 깨닫게 해주시고 평안을 갖게 해주시는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 (어떤 사람 옆으로 오도록 부름 받은 사람 2. 어떤 사람 곁에 서서 격려하며 권고하는 사람)
을 보혜사(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라는 뜻)로 번역했지만 성경번역에 따라 상담자, 보호자 (현대인의 성경), 협조자 (공동번역) 혹은 위로자로 번역한 것을 보게됩니다. 요14:16, 요14:26, 요15:26, 요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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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위의 역할 속에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십니까? 성령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돕는 분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대언자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보호자, 협조자이시지만 우리와 교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에게 말하고 또 듣기도 해야 합니다. 이 것이 기도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함을 왜 못받습니까? 기도 가운데 그 분에게 물어보지 않기 때문에 그 분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계2:7,11,17,29; 3:6,13,22)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싶어도 또 성령님께서 말씀하셔도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므로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란 주님의 음성을 들었겠습니까?
한 해에 아들을 병으로 잃고 또 배 사고로 딸 넷을 잃는 엄청난 비극 가운데서도 호레이쇼 스패포드 변호사가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기도와 간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붙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인생의 가장 힘든 경험을 하였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경험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기도가운데 마음의 평안을 체험하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 감사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염려로부터 우리를 주님에게로,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대할 수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음성을 따르는 것인데,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기도해야합니다
또, 우리는 어떤 환경에 의해서 평안을 잃을 때도 있지만 인간관계를 통해서 평안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틀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 습니다 . 그래서 성경의 표현대로 “서로 물고 먹는 서로를 멸망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갈 5:15) 그러나 기도하면 바뀌어야될 사람이 상대방이 아니라 먼저 내 자신임을 보여주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용서의 관용의 마음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하는 일에 앞장 서게 하십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미 핸드릭스라는 록 음악의 새계적인 기타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락뮤직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위대한 악기연주자라고 알려진 청년이었습니다 arguably the greatest instrumentalist in the history of rock music 그러나 그는 마약 중독자였르며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며 문란한 삶을 살았습 니다. 1970년 어느날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이 마치자 관중들은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열광하던 박수갈채가 갑자기 그쳤습니다. 지미 핸드릭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을 깨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27세의 나이로 약물과용으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평안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미 핸드릭스처럼 어떤 사람이 그 평안에 대해서 물어 본다면 답을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실지로 오늘 그 평안을 누리고 계십니까?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말씀을 시시 때때로 묵상하고 또 기도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안을 모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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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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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려면” (요한복음 14:26-27) 7/9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평강)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골 3:15)
1.은혜의 말씀을 항상 받아들이라
평강은 먼저 은혜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평강을 갖게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롬 15:13)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3:16)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골 3:16)
2.기도로 성령님과 교제하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라”
(계2:7,11,17,29; 3:6,13,22)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