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자: 사랑의 수고 (바울의 본)” 데살로니가전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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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 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저는 지난 목요일 몸이 아팠었습니다. 심하게 아프진 않았지만 몸살이 걸렸는지 입맛이 전혀 없었고 골이 좀 아프고 기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주일전까지 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 12시가 넘었던 것 같은데 제 아내가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맛도 전혀 없고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갑자기 보글 보글 끓인 두부가 듬뿍 들고 매운 고추까지 썰어 놓은 된장찌개 생각이 떠오르면서 먹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고 하루밤 자고 나니까 말끔히는 아니었지만 어는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된장찌개를 맛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된장찌개를 맛있게 맛 본 사람만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도 이와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데살로니가 성도의 사랑의 수고란 남녀간에 느낄 수 있는 에로스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가면 정이 붙고 사랑을 하게되는 가까운 사람이나 친구 간에 느끼는 필로스의 사랑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갖는 사랑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특별한 사랑을 맛본 것입니다. 3주동안 바울과 동역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된장찌게와 같은 사랑을 맘껏 맛보고 중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6절에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사랑의 수고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에게서 보고 경험하고 맛보고 배운 것입니다. .
그러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과 동역자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고 맛 보았길래 이런 사랑의 수고를 행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었는가?
첫번째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습니다.” (2:11) 사도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을 단지 회중의 한명인 숫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기 여러자녀들을 무리로 돌본 것이 아니라 각 자녀를 대하듯 각 각 돌보았다는 말씀입니다. .
사실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각 각으로 돌보았다고 보여집니다. 골로새성도에게 평지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골 1:28 물론 새번역에는 이 말이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하였지만 EVERYONE이란 말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란 뜻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다 듣도록 이란 뜻임)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엡 20:31) 각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것 이 것이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심정입니다.
여러분은 자라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생각해주고 돌보아 주었던 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나 가까운 친척등일지라도 나 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할 때 이미 무의식적으로도 내 자신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인식을 갖게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개인적 사랑과 관심을 받은 우리 형은 아무거나 막 요구하는 것 같은데 저는 부모님에게도 친척에게도 뭘 요구할 자신이 안생깁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 경험이 저의 어릴 때뿐 아니라 어른이 되고 나서 아마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당당하게 자기가 필요한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애들보면 참 부럽습니다. 그만큼 부모님이 이 아이를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꼭 집안 사람이 아니더라도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나 대학 다닐 때나 신학교 다닐 때에 선생님이나 교수님들 중에서 그리고 그동안 교회들 경험을 통해서 전도사 시절 때에도 사실 저 한사람을 따로 붙들고 시간을 드리며 사랑으로 상담과 조언해 준 목사님이나 다른 인생의 선배를 한 사람도 기억 못합니다. 그랬더라면 훨씬 제 삶이 변했을 텐데.. 제가 이아브라함 목사님께 감사한 것은 저를 일부러 부르시고 만나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개인적인 관심과 사랑이 필요 하고 또 우리들의 친척가운데 친구가운데 또 동료 가운데 이런 개인적 관심이 필요한 자가 있음을 압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런 개인적인 관심이 필요로 합니다.
그분들 위해서 각 각 돌보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 적어도 한 분 이상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일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물론이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 각 각을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랑으로 바울을 닮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각 각 돌보았을 뿐 아니라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했다고 말 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2:8)
우선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 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사랑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약 15년 후에 결국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합니다. 사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 선교를 하시는 분들의 보고에 의하면, 탈북자로서 중국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되어 남한으로 가지 않고, 자원해서 동족에게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북한에 다시 들어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것은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자들이 목숨을 걸고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통해 탈북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웠기 때문에 그들 중의 일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자원해서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정말 굉장한 수준의 사랑입니다.
중국이나 러시아나 공산주의 국가로서 한동안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기독교를 완전히 금지했습니다. 러시아는 교회당 건물과 교회지도자를 추방하므로 거의 박멸된 상태였지만 중국은 공산화 전에 200만이었던 성도가 오히려 공산화 가운데서 오히려 급속도로 성장하여 지금은 거의 1억에 가까운 성도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수 많은 지하교회 지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수준과는 다른 삶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일 3:16)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삶은 특별히 헌신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 명령 받았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삶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주님이 요구하시고 기대하는 사랑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할 상황을 경험하게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적은 것부터 서로 받아주고 용서하고 친절하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다른 성도를 위해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잠시 가까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끊임 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본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도 보면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10에도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이들을 염려하며 결국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이들을 떠나서도 끊임없이 이들을 기도 가운데 항상 기억하며 밤낮으로 간구하며 편지를 보내고 디모데를 보내어 응원하고 격려합니다. 이들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오래 전에 한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 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9-21절입니다: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앎으로써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20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21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빌립보 성도들의 형편을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왜 디모데를 보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것입니다. 이 내용이 드러내는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운지 약 10년쯤 된 이 시점에도 빌립보 성도들을 잊지 않고 생각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그리스도 일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예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게 되더라도 서로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기도하며 격려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일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기로는 이아브라함 목사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지금도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우리를 위해 주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조상민 성도님도 내년에는 한의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지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벌써부터 마음이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잊지 않고 서로를 기억하며 계속적으로 기도가운데 기억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교회 선교사로 파송된 분들 - 최바울 선교사 부부, 박진용 선교사님 부부, 윤승주 선교사님 부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주님의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2:19) 주님이 오실 때까지 혹은 자신이 죽어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자신의 희망으로 기쁨으로 자랑할 면류관으로 영광으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들을 기억하며 살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이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죽을 때까지 서로 서로를 기억하고 격려하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서로를 주님 앞에 소망으로 영광으로 기쁨으로 자랑의 면류관으로 삼는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들을 사랑하므로 모법을 보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주야로 간절히 간구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간구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살전 3:10,12)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단지 서로 간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넘치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칭찬합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치심을 받아서, 10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4:9-10)
온 마케도니야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의 형제 자매란 사실입니다. 꼭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이웃이나 멀리있는 다른 지역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란 말씀이 있는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쓴 후 대강 5년 쯤 후에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후 8:1-5)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마케도니야 여러 교회들은 많은 가정교회들로 이루어진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5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2,3절 반복
4절에 보니까, 다른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특권으로 간주했습니다. 특권이라고 믿고 억지로가 아니라 오히려 동참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영원이라는 역사 속에서 위대하게 주님을 섬겼던 성도들로 기록되었습니다. 놀랍게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바울의 본이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아니 힘에 지나도록 우리 가운데 힘든 분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성도들을 위해서 주님의 복음 증거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헌신하고 드리는 교회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우리 21세기 침례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랑의 수고를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본 보기 때문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각 각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가까이 있을 때뿐 만 아니라 그들과 떨어져 있을 때도 항상 그들을 잊지 않고 간구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를 돌보고 사랑하므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고 보여주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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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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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본을 받아 사랑의 수고를 한 데살로니가 교회” 8/20
데살로니가 전서 1:1-7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 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 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 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과 동역자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고 맛 보았길래 이런 사랑의 수고를 행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었는가?
1. 사도바울은 각 사람을 회중의 한명인 숫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습니다.” (살전 2:1)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1)
2. 바울은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 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2:8)
3.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끊임 없는 사람으로 사랑의 본을 보였습니다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2)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3:10)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앎으로써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20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21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빌 2:19-21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2:19)
4.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들을 사랑하므로 모법을 보였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 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살전 3:10,12)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치심을 받아서, 10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4:9-10)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5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고후 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