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교회의 사랑의수고” (데살로니가전서 1:1-7) 2017년 8월 27일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 주에 저는 “바울의 본을 받아 사랑의 수고를 한 데살로니가 교회” 라는 제목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과 동역자로부터 어떤 사랑의 본을 보고 받았기에 이런 사랑의 수고를 행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었는가? 네가지 바울의 사랑의 모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1. 사도바울은 각 사람을 회중의 한명인 숫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대해주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2. 바울은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되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3.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끊임 없는 사람으로 사랑의 본을 보였습니다;
4.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들을 사랑하므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어떤 사랑의 수고를 했는가? 사실 실질적으로 어떤 사랑을 했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랑의 수고를 했다는 칭찬은 사랑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소원도 중요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행동이란 말을 의미할 것입니다. 영어로는 ‘labor of love’라고 말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 Laobor day인데 labor는 ‘노동’이란말입니다. 사랑의 수고란 사랑의 노동을 말합니다. 매주일 주일 점심 식사 준비하는 것 설거지 하는 것, 주일 예배모임 셋업하는 것 반주및 찬양 준비, 장막모임 준비 및 사역, 교회 각 부서 사역 다 사랑의 수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labor란 말은 아기를 낳을 때 산모가 ‘진통’을 느낄 때 labor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기를 임신하고 낳고 기를 때 엄마가 지니는 ‘산고’와 ‘진통’과 ‘수고’를 다 포함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수고란 다른 사람을 위한 노동으로 고통 수고를 의미합니다.
하와이 여러섬들 중에 가장 서쪽에 있는 섬이 Kauai 란 섬이 있습니다. 쥬라식공원이란 공룡이 나오는 영화가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이 섬에서 1955년에 태어난 698명의 어린 아기들을 대상으로 40년동안 관찰하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영양사, 간호원, social workter 등을 팀이 되어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한 사례가 없다고합니다. 연구대상인 그 698명중의 30%에 해당하는 210명의 아기들은 아주 가난 한 가정에서, 태어날 때를 전후로 출산하기 바로 전과 후에 문제가 있게 태아났고, 부모님들이 정신병증세가 있었으며, 또 불화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1살 때, 2살 때, 그리고 10살 때, 18살 때, 32살 때, and 40 살 때 모습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210명의 열악한 환경가운데 자란 아이들중 32살 40살이 되었을 때 정상적으로 사회생활 가정 생활을 하게된 아이들이 72명이 있어서 연구진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거의 모두가 비정상적이고 사회생활을 적응치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외적으로 정상적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연구진이 살펴본 이들 72명의 공통된 특성의 하나는 이들 모두가 부모님의 돌봄은 못받았지만 이들의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부모처럼 돌본 할아버지나 할머니, 삼촌이든, 교회 청소년 사역자던 목사던 어른이 적어도 한명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처럼 돌보며 사랑의 수고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수고를 한 한 사람 때문에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결국 정상적이고 건전한 어른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엄마가 어린자녀를 돌보듯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양육하였다고 말합니다. (어느정도?)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11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사랑의 수고와 노동을 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결국 핍박을 피해서 베뢰아를 거쳐 아데네에 이르렀습니다. 아덴에 이르러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여러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버리거나 믿음에 흔들리지 않았을까 너무 염려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피박이 있었는가? 살전 4:13-15에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우리가 장례식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 여러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할 때는 그 곳을 떠난지 아직 1년이 안되었거나 길어야 아직 2년은 안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이들이 자연사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많은 핍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처에서 겪은 고난과 박해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실상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히 10:32-34)
직업을 잃는 위협, 구경거리가 되는 모욕, 재산을 몰수 당하는 위협,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는 상황에서 신앙의 초보인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잘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디모데를 통해서 바울은 듣게됩니다. “그가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전 3:7-8) “우리가 이제는 살았다" 그들의 믿음이 자신들의 생명과 같다는 고백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극심한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킬 수 있었는가? 여러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 중요한 한 요인을 데살로니가전서 5:11절에서 찾아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세위주십시오”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굉장한 역경가운데서 서로 격려했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서로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함께 시련과 모든 역경을 견디어 내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든지 재산을 몰수 당한다든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든지 하는 외적인 핍박은 거의 전무한 시대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에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내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매일의 양식 큐티의 한 저자가 자신에 대해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부자유한 몸과 만성적인 통증으로 삼 년째 좌절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이렇게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젠 몸도 망가지고,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좌절감과 우울증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면 힘들어 하는 분은 없습니까? 이 세상은 나 혼자다란 생각으로 남이 모를 아픔으로 힘들어 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 아픔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매일의 양식 큐티 저자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립니다. “우리의 몸이 비록 불편할지라도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미소나 격려의 말, 기도, 믿음의 모습들은 아주 다양하고 서로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며 하는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랑의 표현도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해서 우리는 마음의 생각은 있으면서도 표현하는 것이 익숙치 않습니다. 노목자님도 암과 투병할 때 많은 외국사람들이격려의 카드를 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다른 믿지 않는 암환자도 노목자님을 따로 만나 격려해 주셔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말씀하셨었지요. 저도 1999년도에 척추수술을 받는 동안 제가 잠간 출석했던 미국인 교회의 거의 모든 성도들이 격려의 카드를 보내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러분들은 격려의 편지나 전화한통 문자메시지를 보낸적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을 잘 따르자고 내가 끝까지 함께 해 주겠다고 마지막으로 독려한 때가 언제입니까? 또, 언제 마지막으로 격려를 받으셨습니까? 서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위해 웃고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를 책임져주는 관계를 목표로 한다면 먼저 조그만 격려부터 실천하여 서로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기끼리만 아니라 자신들의 울타리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치심을 받아서, 10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4:9-10)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꼭 본교회 뿐 아니라 다른 교회 성도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박유남 자매님 트레스 디아스 올라가는데 그 곳에서 만나는 많은 자매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귀한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사도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13
사도바울의 풍성한 사랑을 위한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고후 8:1-4)
우리 한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된 것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베풀고 희생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자기끼리란 울타리를 넘어 인도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끼리란 울타리를 넘어선 사랑을 베풀라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본을 통하여 주님께서 초청하시는 줄 믿습니다. 꼭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다를 넘어 선교를 못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조그만 것에서부터 시작하므로 이 세상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북한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던 임현수목사님이 2년반동안의 억류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풀려나왔습니다. 그 분이 억류되어 있는 동안 수 많은 분들이 세계 각국에서 편지를 보내왔고 어떻게 그 수용소까지 배달이 되어 그 분에게 수용소 생활을 버틸 수 있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합니다. 자신이 쓴 편지가 주소도 모르는 임현수목사님에게 전달 될 것을 믿고 보낸 이 편지 한 통 한통이 정말 굉장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인 줄 믿습 니다. 지금 아직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의 사랑의 수고가 서로에게 실천되어야 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울타리 바깥으로 눈을 들어 우리들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자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크레센트 교회 pastor George를 위해서도 사랑과 격려의 카드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의 형제이기때문입니다. 입원해 있는 분들을 방문하고 격려카드를 보내고 우리 영어부 청년들에게 우리들의 사랑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떠나 있는 학생들에게 계속 사랑의 패키지릍 보내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교회를 돕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다른 성도들에게 베풀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그리고, 우리 친척들과 이웃에게 우리들의 사랑이 전해지고 결국 세계를 향해 전해지는 사랑의 수고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남녀전도회가 이런데 비젼을 갖고 사랑의 수고를 행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부서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수고를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바울의 기도를 다시 읽겠습니다.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3:12) 바울은 이 기도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다른 성도들을 위한 풍성한 사랑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또 바울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통해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살후1:3) 믿음이 자라는 만큼 사랑이 풍성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
그래서 사도바울은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몰아 붙인다 compelling 휘어잡습니다, 강요한다)라고 고백합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사람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노요한 목자님이 어느날 차를 타고 가는데 왠 버스에 "노영희"라고 적혀있더랍니다..그래서 다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는데도 "노영희라고 적혀있었답니다..그래서 가까이 가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셨답니다.. "노인회"라고 적혀있었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노인회"가 “노영희"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어느 기자가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한 아이가 자기보다 큰 아이를 업고 낑낑 때며 오더랍니다. 그래서 무겁지 않니라고 기자가 물어봤더니 “무겁지 않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리고 나서 연이어 말하기를 “He is my brother” “나의 형이에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제자들에게 “내가 새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결국 같은 명령일텐데 새계명이라고 그랬을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우리가 메가톤급 사랑을 받은 자로서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할 수 있기때문에 새 계명일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이웃이 아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계명일 것입니다
.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항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1:4) 그리고 “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살후 2:13)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 안에서 형제된 자들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지배되어 사랑의 수고를 베푸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데살로니가교회의 사랑의수고” (살전 1:1-7)
1.교회로서 성도간의 사랑을 위한 수고 (격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읍니다. 8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읍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읍니다. 11아시다시피 우리는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처럼 여러분 하나 하나가 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고 지도했읍니다” (살전 2:7,8,11,12)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3-15; 히 10:32-34)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세위주십시오” (살전 5:11)
2.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사랑의 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치심을 받아서, 10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살전 4:9-10)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13) (고후 8:1-4)
3.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당하는 사랑의 수고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3:12)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살후1:3)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아”. (살전1:4)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살후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