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초월하여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 데살로니가전서 1:1-7 2017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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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초월하여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큐티교재 오늘의 양식에 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방문하자 그 할머니는 다른 목사님들에게 한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하나요? 나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항상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주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성가대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내 아이들도 믿는 사람으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보세요. 왜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 목사님은 아시나요?' 그 목사님이 '네, 제가 대답해 드리지요' 라고 하자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좀 말씀해 주세요' 하고 할머니가 졸랐습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조용하게 '나이가 드신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할머니는 양로원에 살면서 자신이 노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아프고 쇠약하였지만 '그 구석에서도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고 주님은 자신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고합니다.
이 두 할머니가 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입니다. 두 분다 연세가 들어 병약하여 양노원 생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 분은 낙망과 좌절에 빠져있지만 다른 한 분은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와 용기를 잃지 않은 분입니다. 같은 신체적조건과 환경가운데 사는 이 두분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
이 두분의 차이는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 가의차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가? 잠깐있는 것을 바라보는가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가? 지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는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너나 나나 별 차이 없어보입니다. 이 두 할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할머니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 자유롭게 살 때에는 자신들이 진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았는지 본인도 남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몸이 약해져 양노원에 들어가 활동이 제한된 환경 속에 갖히게 될 때 진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특별한 문제점이 없고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올 때, 이 세상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이 될 때에,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악성 전립선 암으로 생사가 오고가는 상황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노목자님의 모습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에게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극심하게 힘든 가운데서도 주일 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형제님을 통해서도 그 형제님이 누구를 의지하며 사는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우리는 우리의 참 소망이 어디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사업상의 문제가 있을 때, 자녀들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드러나게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라고 사도바울은 평가하였습니다. 그들이 평탄한 환경가운데 있었다면 결코 그들이 소망의 인내를 가진 성도들인지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푼 교회였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있던 소망이 무엇인지 드러낸 것입니다. (고후 8:9)
우리 21세기 침례교회는 어떻습니까?우리에게는 외적인 박해도 없고 극심한 내적인 궁핌도 없습니 다. 그렇지만, 교회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염려와 스트레스를 가지게됩니다. 정말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위기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정말 우리가 무엇에다가 소망을 두고 있나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기 는 참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소망을 두므로 큰 환난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오히려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푼 데살로니가교회같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 아내와 제가 지난 4월 목회자 선상 세미나에서 특별한 목사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이분은 콜로라도주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신데 9년동안 2명의 권사님만을 모시고 목회하셨습니다. 새벽기도도 꾸준히 하셨는데 단 부부 두사람이 새벽기도를 수년간 지속하신 것입니다.
이분이 2년전 산호세에 미국 한인 침례교 총회에 참석하셨는데, 오시기로 예약된 강사 한분이 참석하시지 못하게되어 이 분이 대신 강사로 집회를 인도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9년동안 2명의 권사님만을 모시고 목회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이분이 겪은 목회의 간증이 다른 어떤 분의 강의보다 가장 많은 박수와 함께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분이 그토록 목회자들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를 주었던 것은 수 많은 목회자들이 성장하지 못한 교회사역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디프레스가 되어 있고 패배자 의식을 갖고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은 숫자의 교회들은 목회자들 뿐 아니라 일반성도님들도 디프레스에 빠집니다. 기쁨과 감사보다는 답답함과 걱정과 부담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를 해야하는데 마음에 기쁨보다는 부담과 걱정이 있으니까 전도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연속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성장해야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를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교회성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성장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참 기쁨의 조건이라면. 그런데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자처럼 기쁨이 없는 자처럼 살아야한다면 이 역시 회개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소망과 기쁨을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소망 없는 자같이 낙담하고 기쁨을 잃고 산다면 주님 앞에 심각한 죄가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환경과 상관 없이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소망과 관련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두가지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눈에 보이는 것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라.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을 피해 베레아를 거쳐 아덴에 이르렀을 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러 환난 중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계속 붙들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디모데를 보냅니다” (3:2-5)
사람들은 환난이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 보다는 환경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심지어 포기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다녀온 디모데는 바울에게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변치 않은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참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2어로 장정들만 5000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갈릴리 바다 동쪽으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 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어부로 뼈가 굵은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막상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 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험한 환경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기가 너무 쉽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험한 환경보다 못지 않게 경계해야할 것은 오히려 평안하고 부요한 환경. 부족함이 없는 환경입니다. 부요하고 평안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들보다 믿음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말하여도 과장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제가 해마다 한번씩가는 팔라 지역 인디안 선교라고 말하지만 실지로 가보면 인디안은 한 사람도 못 만납니다. 그 지역이 인디안 지역은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 말을 들어보니 팔라지역에 카지노가 생기기 전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인디안들이 카지노가 생기고 떼 돈을 버니까 하나같이 다 신앙생활을 등졌다는 것 아닙니까. 신앙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삶이 부요해 지고 여유가 생기다 보면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더 의존하게 되고 소망을 두기 쉬운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처럼 소유던 재물이나 건강이나 자녀나 손자이던 명예 능력등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를 두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런 것들은 짝퉁소망 입니다. 그럴 듯 해보이나 가짜 소망입니다. 일시적인 소망입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이런 소망은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이 반드시 오는데 그 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나의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롬 8:24-25)
우리가 바라보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임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영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식구였던 분들도 이미 여러분 돌아가셨 습니다. 김창수, 정규상, 김재덕, 이양상, 이영자, 최기남, 그리고 최희주 성도님. 언젠가 담임목사도 바뀔 것이고 죽을 것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교회이름도 바뀔 수 있습니다. 21세기 침례교회란 교회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21세기 침례교회 자체가 아니라 21세기 교회가 바라보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간절히 닮기를 원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도 빌립보 교회도 사실상 성경의 페이지 외에는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라보았던 주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주님은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선을 다하되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결코 낙망하지 마시고 우리의 참소망되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 만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 째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소망때문에 기쁨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서로가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교회)
사도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롬 12:12) 소망의 인내란 단지 단지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가운데 참으며 소망가운데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살전 1:6)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교회와 빌립보 교회는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다고 보고합니다. (고후 8:9)
지난 년말에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란 말씀을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란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를 엄밀하게 이야기 한다면 교회성장에 관한 문제 보다도 우리가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란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또 새하늘과 새 땅을 믿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똑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치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살전 2:19-20)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기쁨이란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빌 4:1)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부모의 심정으로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줄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정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 이토록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기쁨이 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기쁨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란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란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드는데, 주님께서 주님의 만찬을 들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 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 15:9-13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그분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그의 제자들이 서로에게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간에 구체적으로 사랑했는지는 언급이 안되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를 칭찬하였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베푸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그들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들이 10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사랑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전 4:9)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고난의 자리에 죽음의 자리에 까지 서로 함께 해 준 것입니다. 살후1:3 그들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하는가? 사도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 들을 위한 기도를 읽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13)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 이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의 삶의 내용이어야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듭니다. 주님의 만찬을 드는 목적은 “이 것을 행함으로 나를 기억하라"란 말씀대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이란 말을 KJV는 주님의 패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요 사랑이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고전 11:26)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의 관계는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사랑의 관계여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고백할 죄는 없는지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해할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리라는 결단,서로에게 가장 귀한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결단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겠다는 결단이 있어야할 줄 압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이제 이 떡과 잔에 참여하므로 주님을 소망과 기쁨으로 삼는 우리들 그리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큐티교재 오늘의 양식에 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방문하자 그 할머니는 다른 목사님들에게 한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하나요? 나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항상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주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성가대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내 아이들도 믿는 사람으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보세요. 왜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 목사님은 아시나요?' 그 목사님이 '네, 제가 대답해 드리지요' 라고 하자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좀 말씀해 주세요' 하고 할머니가 졸랐습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조용하게 '나이가 드신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할머니는 양로원에 살면서 자신이 노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아프고 쇠약하였지만 '그 구석에서도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고 주님은 자신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고합니다.
이 두 할머니가 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입니다. 두 분다 연세가 들어 병약하여 양노원 생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 분은 낙망과 좌절에 빠져있지만 다른 한 분은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와 용기를 잃지 않은 분입니다. 같은 신체적조건과 환경가운데 사는 이 두분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
이 두분의 차이는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 가의차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가? 잠깐있는 것을 바라보는가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가? 지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는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너나 나나 별 차이 없어보입니다. 이 두 할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할머니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 자유롭게 살 때에는 자신들이 진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았는지 본인도 남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몸이 약해져 양노원에 들어가 활동이 제한된 환경 속에 갖히게 될 때 진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특별한 문제점이 없고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짜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올 때, 이 세상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이 될 때에,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악성 전립선 암으로 생사가 오고가는 상황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노목자님의 모습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에게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극심하게 힘든 가운데서도 주일 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형제님을 통해서도 그 형제님이 누구를 의지하며 사는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우리는 우리의 참 소망이 어디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사업상의 문제가 있을 때, 자녀들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 드러나게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라고 사도바울은 평가하였습니다. 그들이 평탄한 환경가운데 있었다면 결코 그들이 소망의 인내를 가진 성도들인지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푼 교회였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있던 소망이 무엇인지 드러낸 것입니다. (고후 8:9)
우리 21세기 침례교회는 어떻습니까?우리에게는 외적인 박해도 없고 극심한 내적인 궁핌도 없습니 다. 그렇지만, 교회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염려와 스트레스를 가지게됩니다. 정말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위기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정말 우리가 무엇에다가 소망을 두고 있나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기 는 참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소망을 두므로 큰 환난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오히려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푼 데살로니가교회같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 아내와 제가 지난 4월 목회자 선상 세미나에서 특별한 목사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이분은 콜로라도주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신데 9년동안 2명의 권사님만을 모시고 목회하셨습니다. 새벽기도도 꾸준히 하셨는데 단 부부 두사람이 새벽기도를 수년간 지속하신 것입니다.
이분이 2년전 산호세에 미국 한인 침례교 총회에 참석하셨는데, 오시기로 예약된 강사 한분이 참석하시지 못하게되어 이 분이 대신 강사로 집회를 인도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9년동안 2명의 권사님만을 모시고 목회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이분이 겪은 목회의 간증이 다른 어떤 분의 강의보다 가장 많은 박수와 함께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분이 그토록 목회자들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를 주었던 것은 수 많은 목회자들이 성장하지 못한 교회사역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디프레스가 되어 있고 패배자 의식을 갖고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은 숫자의 교회들은 목회자들 뿐 아니라 일반성도님들도 디프레스에 빠집니다. 기쁨과 감사보다는 답답함과 걱정과 부담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를 해야하는데 마음에 기쁨보다는 부담과 걱정이 있으니까 전도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연속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성장해야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를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교회성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성장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참 기쁨의 조건이라면. 그런데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자처럼 기쁨이 없는 자처럼 살아야한다면 이 역시 회개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소망과 기쁨을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소망 없는 자같이 낙담하고 기쁨을 잃고 산다면 주님 앞에 심각한 죄가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환경과 상관 없이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소망과 관련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두가지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눈에 보이는 것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라.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을 피해 베레아를 거쳐 아덴에 이르렀을 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러 환난 중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계속 붙들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디모데를 보냅니다” (3:2-5)
사람들은 환난이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 보다는 환경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심지어 포기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다녀온 디모데는 바울에게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변치 않은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참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2어로 장정들만 5000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갈릴리 바다 동쪽으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 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어부로 뼈가 굵은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막상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 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험한 환경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기가 너무 쉽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험한 환경보다 못지 않게 경계해야할 것은 오히려 평안하고 부요한 환경. 부족함이 없는 환경입니다. 부요하고 평안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들보다 믿음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말하여도 과장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제가 해마다 한번씩가는 팔라 지역 인디안 선교라고 말하지만 실지로 가보면 인디안은 한 사람도 못 만납니다. 그 지역이 인디안 지역은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 말을 들어보니 팔라지역에 카지노가 생기기 전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인디안들이 카지노가 생기고 떼 돈을 버니까 하나같이 다 신앙생활을 등졌다는 것 아닙니까. 신앙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삶이 부요해 지고 여유가 생기다 보면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더 의존하게 되고 소망을 두기 쉬운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처럼 소유던 재물이나 건강이나 자녀나 손자이던 명예 능력등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를 두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런 것들은 짝퉁소망 입니다. 그럴 듯 해보이나 가짜 소망입니다. 일시적인 소망입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이런 소망은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이 반드시 오는데 그 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나의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롬 8:24-25)
우리가 바라보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임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영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식구였던 분들도 이미 여러분 돌아가셨 습니다. 김창수, 정규상, 김재덕, 이양상, 이영자, 최기남, 그리고 최희주 성도님. 언젠가 담임목사도 바뀔 것이고 죽을 것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교회이름도 바뀔 수 있습니다. 21세기 침례교회란 교회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21세기 침례교회 자체가 아니라 21세기 교회가 바라보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간절히 닮기를 원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도 빌립보 교회도 사실상 성경의 페이지 외에는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라보았던 주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주님은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선을 다하되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결코 낙망하지 마시고 우리의 참소망되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 만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 째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소망때문에 기쁨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서로가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교회)
사도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롬 12:12) 소망의 인내란 단지 단지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가운데 참으며 소망가운데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살전 1:6)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교회와 빌립보 교회는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다고 보고합니다. (고후 8:9)
지난 년말에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란 말씀을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란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를 엄밀하게 이야기 한다면 교회성장에 관한 문제 보다도 우리가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란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또 새하늘과 새 땅을 믿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똑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치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살전 2:19-20)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기쁨이란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빌 4:1)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부모의 심정으로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줄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정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 이토록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기쁨이 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기쁨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란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란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드는데, 주님께서 주님의 만찬을 들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 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 15:9-13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그분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그의 제자들이 서로에게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간에 구체적으로 사랑했는지는 언급이 안되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를 칭찬하였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베푸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그들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들이 10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사랑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전 4:9)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고난의 자리에 죽음의 자리에 까지 서로 함께 해 준 것입니다. 살후1:3 그들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하는가? 사도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 들을 위한 기도를 읽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13)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 이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의 삶의 내용이어야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듭니다. 주님의 만찬을 드는 목적은 “이 것을 행함으로 나를 기억하라"란 말씀대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이란 말을 KJV는 주님의 패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요 사랑이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고전 11:26)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의 관계는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사랑의 관계여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고백할 죄는 없는지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해할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리라는 결단,서로에게 가장 귀한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결단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겠다는 결단이 있어야할 줄 압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이제 이 떡과 잔에 참여하므로 주님을 소망과 기쁨으로 삼는 우리들 그리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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