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마태복음 5:13) 10/1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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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지난 금요일 “오늘의 양식" 큐티에 마크 래버튼 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일생동안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자신에 대해서 음악적 (음악성이 있다)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음악가인 친구가 그에게 ‘음악성이있다’ 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음악가인 친구의 말이 그에게 끼친 영향을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악기를 연주할 줄도 모르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음악가인 친구가 자신을 알아주고 사랑해주고 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러주는 이름의 힘이 이토록 놀랍다고 그는 간증했습니다.
주기환형제님이 어렸을 때 정말 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때 학예회때 담임선생님이 네가 다 준비해서 행사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라고 말했다고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신을 지켜봤었다는 것이 주기환 형제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재 잡도 새로운 프라젝트를 개발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 그 때의 경험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겐가 인정받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마크 래버튼이나 주기환 형제님이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배를 쫄쫄 굶어가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땅 특별히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에 비하면 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배운 것도 없는 시골 사람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단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따르기로 결정했다는 그 사실 하나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팔복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가 없으면 세상이 썩는다. 너희가 없으면 세상이 맛이 없고 밋밋하다. 세상의 맛이 너희에게 달려있다, 세상이 올바로 되는 것이 너희들에게 달려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선언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사실 옛날에는 당시 방부제도 없고 냉장고도 없으니까 소금이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귀하고 중요했다고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소금때문에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로마 사람들은 해와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Nil utilius sole et sale.) 그 당시 중동지방에서는 소금이 오늘날 우리들의 달라나 혹은 금처럼 통용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실지로 영어에 샐러리라는 말이 라틴말로 소금을 의미하는 salarius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문화를 잘알고 이해하는 William Barclay라는 성서학자는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당신은 소금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라고 말합니다. (“the greatest compliment”)
음악가 친구가 마크 래버튼 분에게 ‘음악성이 있다’라고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이 말한 것보더 더욱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닙니까? 주기환 형제님이 친구가 아니라 담임선생님이 “네가 다 준비해서 행사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라고 말했기 때문에 큰 격려를 받을 수 있지만,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우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정체성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이런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저를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다시 한번 저를 따라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냥 소금이라고 그러시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인데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소금이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귀한 것은 음식이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란 사실은, 그만큼 세상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서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기에 자기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20:21) 어디로? 물론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은 부패할 수 밖에 없기때문에 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세상은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자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영어성경에 보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지 않고 땅의 소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world가 아니라 the salt of the earth라고 되어있습니다. 물론 땅이나 세상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땅의 소금이란 표현을 쓰셨을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반대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 그러나 이 땅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는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땅이란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해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소금이란 말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을 통해서 각 가정에서, 이웃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도록 이 땅의 소금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소라 자매님의 어머니 김미란 선교사님도 함께 하고계십니다. 지금도 세계 방방 곡곡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증거하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탈북자들을 위해 섬기는 선교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많은 탈북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또,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임현수목사님처럼 북한을 150차례 왕래 하면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던 분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있는 북한의 어린이들 유치원 같은 곳에 가서 겨울용 잠바를 잔뜩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합니다. 그랬더니 그 원장선생님이 귀속말로 이렇게 말해주었다고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모르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세상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해외를 나간다던지 아니면 이 곳에서도 거창하게 사역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각 가정에서 일터에서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박승해 형제님 이번에 아버지 학교를 다녀와서 “하나님 나는 아버지입니다"란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서약하고 왔습니다. 아버지기 때문에 가정의 영적목자가 되시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힘든 일도 극복하고 아버지기 때문에 새롭게 도전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길인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 자 처한 처소에서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읽지 않고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을 보니까, But, “그러나”란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금이 소금인 것은 짠맛 때문인데,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것은 소금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마치 다 태운 연탄처럼 아무데도 쓸모없는 연탄재처럼 된 것입니다.
소금은 세상과 달라야 소금인데 세상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할 그리스도인이, 그리고 교회가 타락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리스도인들도 재물에 대한 탐욕에 빠져서 세상 사람들처럼 거짓말하거나 속이는 일이 얼마나 비일 비재합니까?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더 믿지 못한다는 말을 쉽게 듣습니다. 불교를 변질시키고 유교를 변질시킨 샤머니즘이 기복신앙이 그리스도교도 변질시켰다고 말합니다
한 동안 한국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를 요약하면 세가지라고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모이자, 돈내라, 집짓자.” 신약교회는 크고 웅장하고 멋있는 교회건물들이 아니라 조그만 가정집에서 모여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함께 고난 받는 적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역의 성공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얼마나 크고 멋있는 빌딩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교회 예산이 있는가, 얼마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등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자체가 목적이 되고 우선권이 될 때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게 되는 것 아닙니까?
수년전에 KBS에서 성탄축하 메시지를 보내는데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훨씬 많은데도 매일 먼저 카톨릭 추기경이 나와서 축하메시지를 보내더랍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이해를 했는데 번째는 조계종 대표 스님이 성탄축사를 하더랍니다. 기가 막혔는데 끝내 기독교 지도자의 메시지는 없이 그 것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을 듣은 손봉호 교수님이란 기독교 지도자가 따지려고 KBS에 전화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 말이 기독교에는 기독교를 대표할 분을 선정하기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름으로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기관이 많아서 서로 반목하다 보니까 한 기관 대표를 뽑으면 다른 기관에서 비난을 받기에 아예 기독교 대표는 선택을 안한 것 같습니다.
소금은 흔적없이 녹아 없어져야 맛이 납니다. 그런데, 너도 나도 흔적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 오히려 세상못지 않게 타락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이 녹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님들이 간디에게, 인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간디의 대답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가장 방해되는 요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가장 방해가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이 답변이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란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8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과는 180도 다른 복의 개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인 것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에 세상의 소금인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복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소금으로 맛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소금의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가 너무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6)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쉽습니까? 연속극 한편보는 시간보다도 성경을 읽지 않고, 신문을 들여다 볼 시간은 있어도 성경 한페이지 읽을 시간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세상이 너무 재미 있어서 주님 아닌 다른 것을 구하고 주님을 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점 점 우리의 관심이나 가치나 추구하는 바가 점 점 세상사람과 비슷해져가기 쉽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가리켜, 하나님께 복종치 않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 마귀를 대적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 세상과 벗이 되어 두마음을 품은 자라고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라고 훈계합니다. (야고보서 4:9) 우리가 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아야합니까?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맛을 잃으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한번 소금이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짜게될 수 없는가? 그리고 다 쓸모 없게된 연탄재처럼 버려져야 한다는 말씀인가? 맞습니다. 소금의 맛을 잃은 삶은 무의미하며, 삶의 낭비이며 쓰레기 같은 쓸모 없는 삶이란 것을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자체가 쓰레기처럼 버려려야한다면 저는 물론이고 이자리에 아무도 남아 있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 소금으로서의 맛을 잃은 경험이 있는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셔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위라는 말씀입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2] “이 말은 다른 말로 너는 세상의 소금이니"란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소금의 맛을 잃었습니다. 쓰레기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벌써 1년이 넘은 일입니다만, 저는 어느날 큐티를 하면서 “세상에 가치관 때문에 자존감의 문제로 갈등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나를 자학하는 모습. 주님의 가치나 주님의 심정과는 너무 상관 없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소금의 맛을 잃은 저의 모습을 보며 낙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큐티를 마치고 사도바울이 에베소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던 내용을 읽게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19절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구절을 여러번 읽으면서 내 안에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 안에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부정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세상의 것에 흥미를 느끼고 부러워 하고 그 것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지만, 또 그러나 그런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회개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만을 자랑하고저 하는 아름다운 소원이 제게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끊임 없는 소원이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소금의 맛을 잃은 삶, 쓰레기 같은 삶을 소금의 삶으로 회복시키시는 전문가이십니다. (소금은 스스로 잃은 맛을 다시 짜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지면서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8-10) 우리는 항상 죄가운데 살기 쉽지만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회개를 통해서 소금의 맛을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 9:50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금의 맛을 회복할 지에 대해서 실질적인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치 소금 맛을 잃으면 서로 화목하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요한1서 1장 7절 말씀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와 같은 말씀으로 보입니다.
화목, 서로 사귐은 죄의 용서와 소금의 맛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실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들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복수고 소금은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공동체로서 소금이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지체로서 올바른 관계 화해된 관계를 화목한 관계를 갖지 못하면 공동체로서 소금 맛을 잃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기 그의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 개인을 관찰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특별히 우리들의 관계성을 주목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화목치 못한 관계성 가운데 있다면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소금의 맛을 잃게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고 관계를 회복하시과 소금 맛을 회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를 날마다 순간마다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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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0/15/17)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태복음 5:13)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팔복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때문에 주님께서 이 가난하고 못배운 갈릴리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신다. 너희가 없으면 세상이 썩는다. 너희가 없으면 세상이 맛이 없고 밋밋하다.
세상의 맛이 너희에게 달려있다, 세상이 올바로 되는 것이 너희들에게 달려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선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 께서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보내셨고 (요 3:16),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요 20:21)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소금 (the salt of the earth) 이란 말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사는 자들로서 각 가정, 이웃, 직장, 학교등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소금으로서 짠맛을 잃고 세상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다"란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하신 8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복을 추구면서 소금으로 맛을 잃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 마귀를 대적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 세상과 벗이 되어 두마음을 품은 자의 삶을 살기 너무 쉽기때문이다. 이 것이 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이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인간 스스로는 잃은 맛을 다시 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금의 맛을 회복할 지에 대 해 서 실질적인 조언을 하신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 (막 9:50) 소금 맛을 잃으면 서로 화목하라라는 말씀이다. 주님 은 실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들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 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공동체 로서 소금이란 말씀이다. 우리가 공동체의 지체로서 올바른 관계 화해된 관계를 화목한 관계를 갖지 못하면 공동체로서 소금 맛을 잃은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날마다 순간마다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돌아보며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