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16) 11/1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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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https://www.youtube.com/watch?v=29Q4bmogh14 (바보의사 안수현성도에 관한 간략한 소개 비데오)
굉장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안수현형제 자신이 굉장해서가 아니라, 안수현 형제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굉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고백대로 안수현 형제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이었습니다. (갈 2:20)
바울의 심령 속에 계셨던 예수, 안수현 형제의 심령 속에 계셨던 예수가 여러분과 저의 심령 속에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심령속에서 강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엡 1:19)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빌 2:13) 그러니까,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도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시고 있으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지배 받느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엡 3:17-19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되면,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절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안수현 형제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최바울 목사님, 윤승주목사님 최보아스선교사님, 김봉년 선교사님같은 삶과 사역을 감당하게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위험을 무릎쓰고 탈북자 사역을 하는 거의 100%가 그리스도인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원래 다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강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작년 5월 어느날 빌립보서 3장으로 큐티를 하는데 3장 2절에 보면 할례파 사람들을 가리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란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내 자신이 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신앙고백과 설교는 그럴듯 하게 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 신뢰하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존감을 갖고 살기보다는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침을 질질 흘리는 나의 모습이 개와 같은 모습으로 연상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큐티를 마치고 아까 인용했던 에베소서 1:19절을 읽게되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제가 매주 적어도 한번 이상 정기적으로 읽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성령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 안에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 보니까 세상가치를 추구하는 “개"와 같은 모습이 있지만, 반면 이런 개같은 모습을 진짜로 역겨워하고 경멸하는 가치관과 의로움이 제게 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만을 자랑하고저 하는 아름다운 소원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칭찬받고도 싶지만 칭찬 받는 것이 오히려 역거울 때도 있고 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것이 내 마음을 기쁘게할 떄도 있음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사람 앞에 솔직하고싶은 소원이 항상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온유, 충성, 절제의 모습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분명 내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그 능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두달 전에 멕시코 티화나를 방문했는데 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요바니라는 30대 중반의 청년이 일부러 저를 찾아와 너무나도 저를 반갑게 맞아 주며 의아할 정도로 제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영문을 몰랐는데 지난 10월 달에 갔을 때 그 청년이 얼마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아서 지금 목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사역의 열매로 목사로 섬기는 청년이 두명인 셈입니다. 또 한형제가 신학교에서공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와 제 아내가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쳤다거나 제자훈련을 한 경험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성장하면서 저희들의 삶을 통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저들은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부족한 저희지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빛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는 것”처럼 드러나게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15절을 읽습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됫박이란 옛날에 쌀집에서 한되 두되 쌀을 퍼 재어서 주던 네모난 나무 그릇같은 것을 말하는데, 영어성경에는 바구니, 그릇으로 번역했습니다. 등불을 이런 그릇이나 됫박 밑에 두지 않고, 등경이 즉 스탠드 위에 두어 집안을 환히 비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아무데나 두지 말고 빛이 필요한 곳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빛이 필요한 곳에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빛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빛이 필요한 곳이 어디입니까? 성푸랜시스는 다음과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곳에 믿음을 심게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곳에 진리를 절망이있는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곳에 괌명을 슬픔이 있는곳에 기쁨을 심게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 상처가 있는 곳, 분열, 의혹, 오류, 절망, 슬픔이 있는 곳이 어두움이 있는 곳이요 빛이 필요한 곳입니다.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빛이 필요한 곳에 빛을 비추는 삶을 말합니다.
제가 약간 가사를 바꾸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죽음으로서 나로 영생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생명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빛이 되었고 사랑을 베풀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기도문의 저자인 성푸랜시스가 이런 기도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송가의 가사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이 있었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 고인 곳에 그의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항상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에게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과 관심과 용서와 받아줌이, 나의 격려가, 나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분이 누구입니까? 나의 따듯한 손길과 방문을 필요로 하는 분이 누구인가? 절망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망의 음침한 그늘 가운데 있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열등감에 시달리는 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 복음이 필요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필요한 분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우리가 비추는 빛이 필요한 곳입니다.
성령님께서 빛이 필요한 분들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계속 신호와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관심때문에 다른 일 때문에 마음이 바빠서 성령님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그냥 가볍게 지나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912년 4월 10일, 마침내 타이타닉 호는 사우샘프턴 항구를 떠나 처녀 항해를 시작했다. 4만6천톤의 무게에 길이가 168미터나 된 거대한 배였습니다. “하나님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라고 광고를 냈던 배입니다. 그러나, 4월 14일, 나흘 만에 타이타닉 호는 빙산을 받고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배들로부터 여섯 번이나 경고통신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합니다. 먼저 아티나이 호에서 전달된 메시지였는데, 이 메시지는 접수되고 5시간이 지나서야 전송되었다고합니다 그. 다음 캘리포니안 호에서 전송된 메시지는 식사 중인 선장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다고합니다. 메사바 호에서 전송된 메시지는 무선 담당자가 혼자 있는 바람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전달되지 못했고. 캘리포니안 호에서 또 다시 보낸 마지막 메시지 역시 무선 담당자가 자신들의 사업에 관한 교신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끊겨졌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배 갑판에 높게 위치한 선교(船橋)에서 래파하녹 호로부터 램프 불빛을 이용한 모르스 부호를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다고합니다. 6번의 경고메시지중 하나도 받지 못했거나 받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타이타닉 호는 침몰한 것입니다.
심각한 메시지를 경홀이 여기고 심각하게 생각치 않았던 무관심 때문에 배와 함께 수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조금도 관심을 갖는다면 조금 더 부지런하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이, 우리의 무관심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 중에 구원받지 못하는 분이 생긴다면 얼마나 땅을 치며 통곡할 일입니까? 저부터 먼저 잃은 영혼을 위해 좀 더 경각심을 갖고 기도하며 울부짓어야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목숨을 걸고 교회개혁에 앞장서므로 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히 기도와 말씀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복음을 모르므로 어두움과 절망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빛이 필요한 곳을 가장 잘 아시며 가장 안타까와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이 신호를 보내시고 메시지를 보낼 때 들을 수있도록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그리고 기도가운데 항상 그 분에게 물어보야합니다
빛이 필요한 곳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함께 또 한가지 필요한 것은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2:10-11
내가 미워하는 형제, 싫어하는형제, 맘에 안드는 형제, 멀리하고픈 형제가 있다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둠 가운데 있다는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일 2:9) 자기 스스로가 어둠에 있기 때문에 남에게 빛이 되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자신과 부딛치지 않고 비켜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어떤 사람과 그만 부딛치고 말았습니다. 맹인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눈도 없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니까 부딛친 사람이 맹인이 들고있는 등불을 보고 말했습니다. "자네가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져있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내 등불이 이미 꺼진 줄 조차 모르고 빛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2:11) 자기 스스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빛을 비추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빛의 비춤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므로 빛이 필요한 곳에 빛을 비추어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마지막 16절을 15절과 함께 읽습니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비추는 빛을 보고 우리 자신에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를 베풀떼 자신이 영광받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주며 전재산을 팔아 구제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가 쉬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한국교회가 자선 행위를 많이 하면서도 오히려 욕을 얻는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의 이름을 앞세우고 자기 교회를 늘리기 위해 행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전도도 순수하게 예수만을 전하기 보다는 자기 교회를 선전하고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성도끼리도 접근하면 순수한 교제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네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쟌 맥아더 목사님은 “만약 우리들이 행하는 어떤 일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보다 우리 자신에게 끌어들이게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 우리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을 본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좋은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보다 우리 자신이 칭찬받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을 본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고 부끄럼 없이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서 실지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기가 너무 쉽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5:26 ) 투기라는 말이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질투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에는 (envy, jealousy)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부러워하며 불만족하는 마음 혹은 분개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열등감도 되고 질투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을 노엽게 하거나) 아직 남들과의 비교의식을 갖고 힘들어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헛된 영광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증거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보면 외모에 비교의식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못생겼다란 말에 힘들어 한적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잘생기고 못생기고 보다는 늙어보이는데 신경을 많이 쓰게되는 자신을 봅니다. 지금부터 한 15년쯤 전에 고등학교 동창을 몇십년 만에 만났는데 나를 만나자 마자 “너는 왜 그렇게 늙었냐?”라 그러는데 한번에 끄친 것이 아니고 그 후에도 두번이나 반복해서 제게 이야기 한 것이 제게 상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몇년 전에는 히스패닉교회 Juan Santos목사님이 여러 목사님들이 계신데 이아브라함 목사님하고 저하고 누가 더 나이가 많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보다 12살이나 연세가 많으신 이아브라함 목사님과 저를 비슷한 연배로 보았다는 것이 불편한 겁니다. 내가 이아브라함 목사님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 분이 젊어 보이는 것먼을 감사해야할 텐데..
반대로, 제 아내가 대학때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목사님 중에 저보다 대여섯살 적은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서 주름살도 많고 특별히 많이 늙어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 볼 때 위로를 받는 제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자신이 나이가 들어보이더라도 다른 분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기를 워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이렇게 비교적으로 신경쓴다면, 내가 단지 외모의 문제에서만 남들과 비교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상대방이 나보다 더 인정받고 존경받고 칭찬받는 것을 내가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도 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단정한 외모와 복장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 영광은 다만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돌리십시오.” (시 115:1) 이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예배자로서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도바울도 참된 예배자의 특징을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0 (빌 3:3)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인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의 특징을 두가지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합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자가 참된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세속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을 갖는 것들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스펙이나 나의 육체적 인간적 능력등 세상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게하는 조건들을 의존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평생동안 그리고 지금도 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도록 배우고 영향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비교의식에 노예가 되지 않고 그리스도 만을 자랑하고 세상기준으로 나 자신이나 남을 보지 않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참예배자로서의 삶이 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 자랑과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 따로 자기 자신과 서로를 비교하며 판단하는 사람들로 그득차 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의지하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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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라 ” (갈 2:20)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엡 1:19)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빌 2:13)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 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엡 3:17-30)
1.빛이 필요한 어두운 곳을 알라: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마 5:15)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2:10-11)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일 2:9)
2.빛을 비추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비추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 5:1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 (질투, envy)하지 말지니라” (갈5:26 )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전 10:31) .
“주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 영광은 다만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돌리십시오.” (시 115:1)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세속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빌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