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선교 (wholistic mission)은 사역(ministry)이 아니라 삶(lif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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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선교는 사역이 아니라, 삶이다.
다른 삶의 만남
어느 날 몽골 국립 의과 대학의 한 교수가 내 방에 찾아왔다. 그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간염과 간경화 질환에 대해 6 개월간 연수를 받았으며, 전문적인 부분에 있어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좋은 저널에 연구 논문을 게재하고, 학술 대회에서 연구 내용을 발표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몽골 어느 한 신문의 한 면 절반 크기에 해당하는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그 신문을 들고 기쁜 얼굴로 내 방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전문적인 영역의 발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인생에 두 가지 기둥이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그는 모른다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는 당신이 지금 세우고 있는 전문적(professional)인 기둥입니다. 모든 우리의 삶에는 전문적인 성장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영적(spiritual)인 기둥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장하는 영적인 기둥입니다. 내게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줄 뿐만 아니라, 전문영역을 더욱 탁월하게 합니다.” 그 교수는 내 말을 듣고는 어깨와 팔을 한쪽으로 뚝 떨어뜨리며, 몸을 옆으로 기울여 굽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불균형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둥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후에 그는 복도에서 나와 마주치면, 웃으면서 어깨를 씰룩 기울이며 인사를 건넨다. 영적인 상태가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의 인사가 나를 기쁘게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의 구원자, 주인이 되셔서 그를 영적으로 자라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나는 하나님 없는 그 몽골 교수의 삶이 얼마나 영적으로 공허와 혼동과 흑암 가운데 있을 지 안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탄식이신 것을 믿는다. 내가 그 교수와 삶을 나눌 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의 삶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제자로 사는 삶
위대한 사명(마 28:19-20)의 핵심은 제자를 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제자가 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즉, 위대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날마다 제자의 삶을 사는 것(눅 9:23)과 분리될 수 없다. 위대한 명령(마 22:37-40)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바로 제자 된 삶의 열매(요 13:34- 35)인 사랑을 이루는 것이 위대한 명령의 핵심이다. 즉, “날마다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위대한 사명과 위대한 명령을 이루는 삶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임이 틀림없다.
위대한 사명(마 28:19-20)+위대한 명령(마 22:37-40) = 위대한 삶
= 날마다 제자로 사는 삶(눅9:23)
“‘날마다’는 어제 제자로 살았던 삶이 오늘의 제자 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라는 뜻이다. ‘제자의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위대한 사명, 위대한 명령을 이루는 삶은 “매 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갈 2:20).”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나의 삶이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 날마다 제자로 사는 삶이 다른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삶이다. 그것이 선교라 믿는다.
삶으로서의 총체적인 선교
선교를 특별한 사람, 특별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구별하지 않기를 원한다. 현대인들은 속도와 이동성이 매우 증가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선교는 지역적인 국한과 특정인의 부르심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명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선교는 살고 있는 지역이 중요하지 않다. 파송 국가와 선교지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것이다. 많은 민족들이 이동, 이주해 살고 있는 것을 쉽게 접하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느 곳이든 주위에는 선교적인 헌신의 요구가 뒤따른다. 따라서 선교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곳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선교의 시작인 것이다.
선교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인간 기계의 역할도 물론 아니다. 선교는 ‘사역’이라는 단어로 국한되어 정의되지 않고, ‘삶’이라는 단어로 정의 되어야 한다. 선교가 그리스도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몸을 빌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나는 현장이기 때문에, 선교가 삶이라면 선교의 모양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모든 삶의 모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한 선교와 총체적 선교를 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선교는 총체적인 선교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이라는 말은 전 인격적이고,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따라서 선교는 삶과 삶이 만나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그러기에 ‘나의 삶이 어떠한가, 내가 어떻게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가족과 교회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내가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
나는 의과대학의 교수이며, 소아과 의사로서 몽골 국립 의과 대학에서 일하고 있으며, 의과대학과 병원을 중심으로 많은 나의 삶이 쓰임을 받고 있다. 나의 삶은 의료 영역에 있는 많은 다른 삶들과 만나고 있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만난다. 소아과 레지던트와 강의로 만난다. 석‧박사 학생들과 연구를 하며, 논문을 쓰면서 만난다. 그러나 그 만남은 간단히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전반적인 삶을 보고 읽는다. 몽골 교수, 의사들과 성경 훈련을 하며 영적인 영역에서 만난다. 그 만남은 성경적인 지식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머무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서로의 삶이 만나며, 나의 모든 삶의 영역이 다른 삶과 만나 영향을 준다. 그들에게 나의 삶이 그들 눈에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나의 삶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나의 삶은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알량한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몽골 의료인들을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 명쾌하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하는 능력이 내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들을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만나시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나길 소원한다.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그분께 온전히 지배되며, 그분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한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지 않고서는, 만나는 수많은 삶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소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것과 영적인 것 모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삶의 영역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나의 모든 삶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은 여러 관계로 정의 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아내와 한 몸 된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 교회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관계를 어떻게 복음에 합당하게 이룰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이웃과 세상의 어떠한 관계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복종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신비와 모든 관계에 있어서 화평 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나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듯이, 나와 만나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 나는 관심이 있다. 한 사람의 일부만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전하고, 그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그칠 수 없다. 영적인 말씀만 공급하고 도전하는 것도 한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한 사람만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삶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에 관심이 있다. 그가 학교나 병원에서 이루는 삶의 모습을 넘어서, 가정과 세상에서 이루는 삶의 영역에 관심이 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소원은 나의 삶과 나와 만나는 이들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온전한 관계의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과부의 설움, 홀아비의 사정
“과부의 설움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의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상황에 있기에 동병상련 (同病相憐)으로 서로가 통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과부와 홀아비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이는 예수님이시고,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과부와 홀아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있다면,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알고, 해답을 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 나는 몽골의 의료 전문 영역에서 살고 있는 의사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되길 소원한다.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의료 영역에서 만나는 교수들과 의사들의 마음을 다른 이들 보다는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전문적인 영역의 고민들과 그들의 삶에 있어서 수많은 문제들을 내게 가지고 온다. 과부가 과부를 만났고, 홀아비가 홀아비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내게 전문적이고, 영적인 경험들이 있지만, 그 경험들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전문적인 영역도 계속 바뀌고 있고, 영적인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기에 여러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 창의적인 지혜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라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오늘도 나를 부인하고 제자로 살기를 소원한다. 내가 죽고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시기를 소원한다. 전문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포함한 나의 모든 삶이 그분께 지배될 때, 총체적인 삶으로 선교의 열매를 거두리라 믿는다.
다른 삶의 만남
어느 날 몽골 국립 의과 대학의 한 교수가 내 방에 찾아왔다. 그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간염과 간경화 질환에 대해 6 개월간 연수를 받았으며, 전문적인 부분에 있어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좋은 저널에 연구 논문을 게재하고, 학술 대회에서 연구 내용을 발표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몽골 어느 한 신문의 한 면 절반 크기에 해당하는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그 신문을 들고 기쁜 얼굴로 내 방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전문적인 영역의 발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인생에 두 가지 기둥이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그는 모른다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는 당신이 지금 세우고 있는 전문적(professional)인 기둥입니다. 모든 우리의 삶에는 전문적인 성장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영적(spiritual)인 기둥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장하는 영적인 기둥입니다. 내게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줄 뿐만 아니라, 전문영역을 더욱 탁월하게 합니다.” 그 교수는 내 말을 듣고는 어깨와 팔을 한쪽으로 뚝 떨어뜨리며, 몸을 옆으로 기울여 굽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불균형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둥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후에 그는 복도에서 나와 마주치면, 웃으면서 어깨를 씰룩 기울이며 인사를 건넨다. 영적인 상태가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의 인사가 나를 기쁘게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의 구원자, 주인이 되셔서 그를 영적으로 자라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나는 하나님 없는 그 몽골 교수의 삶이 얼마나 영적으로 공허와 혼동과 흑암 가운데 있을 지 안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탄식이신 것을 믿는다. 내가 그 교수와 삶을 나눌 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의 삶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제자로 사는 삶
위대한 사명(마 28:19-20)의 핵심은 제자를 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제자가 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즉, 위대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날마다 제자의 삶을 사는 것(눅 9:23)과 분리될 수 없다. 위대한 명령(마 22:37-40)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바로 제자 된 삶의 열매(요 13:34- 35)인 사랑을 이루는 것이 위대한 명령의 핵심이다. 즉, “날마다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위대한 사명과 위대한 명령을 이루는 삶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임이 틀림없다.
위대한 사명(마 28:19-20)+위대한 명령(마 22:37-40) = 위대한 삶
= 날마다 제자로 사는 삶(눅9:23)
“‘날마다’는 어제 제자로 살았던 삶이 오늘의 제자 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라는 뜻이다. ‘제자의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위대한 사명, 위대한 명령을 이루는 삶은 “매 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갈 2:20).”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나의 삶이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 날마다 제자로 사는 삶이 다른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삶이다. 그것이 선교라 믿는다.
삶으로서의 총체적인 선교
선교를 특별한 사람, 특별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구별하지 않기를 원한다. 현대인들은 속도와 이동성이 매우 증가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선교는 지역적인 국한과 특정인의 부르심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명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선교는 살고 있는 지역이 중요하지 않다. 파송 국가와 선교지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것이다. 많은 민족들이 이동, 이주해 살고 있는 것을 쉽게 접하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느 곳이든 주위에는 선교적인 헌신의 요구가 뒤따른다. 따라서 선교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곳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선교의 시작인 것이다.
선교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인간 기계의 역할도 물론 아니다. 선교는 ‘사역’이라는 단어로 국한되어 정의되지 않고, ‘삶’이라는 단어로 정의 되어야 한다. 선교가 그리스도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몸을 빌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나는 현장이기 때문에, 선교가 삶이라면 선교의 모양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모든 삶의 모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한 선교와 총체적 선교를 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선교는 총체적인 선교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이라는 말은 전 인격적이고,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따라서 선교는 삶과 삶이 만나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그러기에 ‘나의 삶이 어떠한가, 내가 어떻게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가족과 교회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내가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
나는 의과대학의 교수이며, 소아과 의사로서 몽골 국립 의과 대학에서 일하고 있으며, 의과대학과 병원을 중심으로 많은 나의 삶이 쓰임을 받고 있다. 나의 삶은 의료 영역에 있는 많은 다른 삶들과 만나고 있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만난다. 소아과 레지던트와 강의로 만난다. 석‧박사 학생들과 연구를 하며, 논문을 쓰면서 만난다. 그러나 그 만남은 간단히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전반적인 삶을 보고 읽는다. 몽골 교수, 의사들과 성경 훈련을 하며 영적인 영역에서 만난다. 그 만남은 성경적인 지식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머무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서로의 삶이 만나며, 나의 모든 삶의 영역이 다른 삶과 만나 영향을 준다. 그들에게 나의 삶이 그들 눈에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나의 삶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나의 삶은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알량한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몽골 의료인들을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 명쾌하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하는 능력이 내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들을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만나시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나길 소원한다.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그분께 온전히 지배되며, 그분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한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지 않고서는, 만나는 수많은 삶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소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것과 영적인 것 모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삶의 영역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나의 모든 삶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은 여러 관계로 정의 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아내와 한 몸 된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 교회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관계를 어떻게 복음에 합당하게 이룰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이웃과 세상의 어떠한 관계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복종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신비와 모든 관계에 있어서 화평 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나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듯이, 나와 만나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 나는 관심이 있다. 한 사람의 일부만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전하고, 그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그칠 수 없다. 영적인 말씀만 공급하고 도전하는 것도 한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한 사람만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삶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에 관심이 있다. 그가 학교나 병원에서 이루는 삶의 모습을 넘어서, 가정과 세상에서 이루는 삶의 영역에 관심이 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소원은 나의 삶과 나와 만나는 이들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온전한 관계의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과부의 설움, 홀아비의 사정
“과부의 설움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의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상황에 있기에 동병상련 (同病相憐)으로 서로가 통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과부와 홀아비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이는 예수님이시고,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과부와 홀아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있다면,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알고, 해답을 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 나는 몽골의 의료 전문 영역에서 살고 있는 의사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되길 소원한다.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의료 영역에서 만나는 교수들과 의사들의 마음을 다른 이들 보다는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전문적인 영역의 고민들과 그들의 삶에 있어서 수많은 문제들을 내게 가지고 온다. 과부가 과부를 만났고, 홀아비가 홀아비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내게 전문적이고, 영적인 경험들이 있지만, 그 경험들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전문적인 영역도 계속 바뀌고 있고, 영적인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기에 여러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 창의적인 지혜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라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오늘도 나를 부인하고 제자로 살기를 소원한다. 내가 죽고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시기를 소원한다. 전문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포함한 나의 모든 삶이 그분께 지배될 때, 총체적인 삶으로 선교의 열매를 거두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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